죽림사
죽림사 상량문
상량문1
上古에 佛日이 처음 三十劫을(?) 밝히고(敎化하고) (敎化의 時期가) 다시 到來하매 孝明菩薩이 練燈佛前에 다섯 송이 꽃을 供養하시고 來世에 부처를 이루리라 授記를 받으시었다. (드디어 때가 이르러) 여섯 어금니를 가진 흰 코끼리를 타고 도솔천궁을 내려오실 적에 帝釋天王이 八部金剛을 왼쪽에 護衛케 하고 觀音 文殊와 四天諸神을 오른쪽에 모시게 하니 毘藍宮中에서는 瑞氣가 가득하였다. 威神力으로 降臨하사 마야부인의 胎中에 드시니 때는 癸丑 七月 十五日 午時였으며 無憂樹나무 아래서 오른쪽 겨드랑이로 誕生하시니 甲寅 四月 初八日 寅時였다. 아홉 龍이 香水를 吐해 全身을 씻어주고 四方에서 연꽃이 솟아올라 손발을 지탱하니, (그는) 바로 일어서시어 왼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오른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부르짖기를 “하늘 위 하늘아래 오직 나 홀로 높다 ”고 하시었다. (存은 尊의 誤字) 이름을 “瞿曇” 또는 “悉達” 이라 하였으며 열아홉살 때 밤중에 城을 넘어 (出家하시어) 雪山의 菩提樹 아래로 드사 五年을 仙道를 닦으시고 六年을 參禪하시다가 甲寅年 臘月 八日에 庚星을 보시고 (드디어) 大覺을 이루시니, 크시다! 西方大聖이시여! 그 浩浩蕩蕩하심이 가이 없으시도다! 鹿苑에서 三生의 因을 說하시니 뭇 衆生이 함께 讚嘆하고, 精舍에서 四諦의 法을 說하시니 諸天이 모두 모여 드셨도다. 그가(修行者) 입는 옷을 僧伽梨, 鬱多羅僧, 安陀會라 하거니와 이 三衣와 一鉢(철바루)과 坐具 (尼師壇-隨坐衣 亦爲臥具)와 ?水囊,(比丘六物 여섯 번째 록수낭 곧 물 거르는 주머니를 말함.) 이 모두를 세 뼘 혹은 다섯 뼘 (팔꿈치 ?字로 팔꿈치는 손목서 대체로 큰 한 뼘 길이임) 으로 그 量(限定)을 삼으셨다. 袈裟를 떨어진 천조각을 주워 기워 만드심은 貪慾情을 없애기 위함이요, 條葉이 分明함은 福田을 나타내 보인 것이니, 그 모양은 三乘聖賢의 同一한 法式이요, 그 이름은 九十六種 外道들도 듣지 못한 바였다. 法日의 金烏요 應月의 玉?라, 四方天王을 온갖 요사스러운 것들이 (감히) 犯치 못하니 사람들이 三災의 厄을 피할 수 있었고, 龍들도 금시조에게 잡아먹히는 어려움을 免할 수 있었다.
四十九年間을 說法하시다가 拘尸羅城의 尼連河畔 娑羅雙樹 아래서 涅槃에 드시니 (이는 곧) 圓寂의 뜻이다.
漢明帝 永平 十三年에 꿈에 金身이 現夢하매 그 키가 丈六(六丈餘는 誤謬임)에 이르렀다. 王遵博士를 보내어 西域에서 맞아 드리니, (이렇게 하여) 達摩 (法)와 四十二章經 등이 中原寶林에 大道를 通하는 始初가 되었고 그 隆盛한 敎化에 힘입어 東方에 까지 아름다운 이름이 떨치게(미치게) 되어 三藏을 지팡이로 하여 삼가 거두어 오니 四億 八萬四千의 經卷은 六祖 의 道心이요 널리 三百萬 七千의 梵刹이 솟으니 慈悲가 넓고 커서 三千世界에 가득 차고 몸소 부지런히 濟度하니 九萬長天의 亡靈들까지 두루 濟度하였다. 羅漢들이 항상 에워싸 모시니 五百優曇의 꽃이요, 三千大衆의 菩薩이 嚴히 모시니 覺樹의 寶榻(보탑)[장엄.莊嚴]이셨다.
이곳 浦項 竹林山은 新羅때의 鳳飛山으로 그 아래 遺蹟址(유적지)가 한곳이 있는데 이것이 新羅 때 竹林寺의 옛터다., (일찌기) 鴛鴦夫人(원앙부인)의 修道處로 그의 아들 安樂國 悟眞의 땅이었다. 이에 天時가 밝게 이르고 地運이 크게 통하매 드디어 이 땅에다 작으나마 (다시) 절을 이루게 되니 바로 四方 正位의 좋은 運數에 합하고 兌坐(西坐) 震向(東向)(서쪽에 坐定하여 동쪽을 向한터)이라. 陰陽이 共히 깨끗한 吉 方이요, 乙水 午祿(문을 내는 方向)에 應 하여 문을 내매 巨文의 星煇를 드렸다. (巨文星의 별빛이 바로 비춰들게 문을 내었다는 말인 듯). 며칠만에 일이 이루어지니 마치 훗날 이런 모양의 집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이것이 다 하늘의 도움으로 完備된 것이다. 지금 새로 지은 이절의 이름을 (또한) 竹林이라 이름하고 殿閣이름을 慈光이라 하니 그 興廢는 저절로 하늘의 運數에 달렸으나 經營함은 실로 사람의 마음에 달린 것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영험이 降臨하시매 마치 金相(부처님의 眞身)을 직접 뵙는 듯, 스님들이 三寶前에 合掌 禮拜드리니 三架八楹(지붕의 세 대들보 와 여덟 개의 기둥)이 옛 법도를 바꾸지(어기지) 않았고 千山萬壑(천산만학)이 (오늘따라) 더욱 새롭게 빛나네. 어찌 後衲들만 아름답게 보는데 그치리요? 이로부터 부처님의 賢德(크신 敎化)이 더욱 향기 넘치는 땅이 될 것이다. 드높은 산, 푸른 기운, 그 울창한 기운이 처마마다 서리고, 넓은 바다, 맑고 푸른 빛깔, 殿閣 앞까지 祥瑞롭게 이어지네. (내 오늘 비록 衆生이지만) 六根의 慾으로(無明으로) 肆唱(사창)(맘대로 부르고)하고 三樹의 정기로 庸助(용조)(..로 서로 도와)하여 一切衆生 成正覺 하니 歸依佛歸依佛이요, 三途離苦破刀山하니 願往生願往生이로다. 祖意直敎言下曉는 靑山疊疊이요 玄微須透口中眞은 蒼海茫茫이로다.
抛樑東하니 鶴山峰 머리에 햇살이 반쯤 걸렸도다.
이로써 當年의 精氣 있음을 알겠으니
千秋에 머물며 混?을 비추리라(일깨우리라)
抛樑南하니 天馬山이 저절로 빛을 머금도다.
곁의 雪巖이 六歲苦에 달하니
그 날 分明 깊은 이치를 얻었으리.(부처님의 육년 고행을 말함인 듯)
抛樑西하니 바위 우뚝 솟아올라 높은 처마와 가지런하네.
이로서 大道가 높고 넓음을 알겠으니
악한 놈들이 감히 발걸음을(넘보지) 못하리.
抛樑北하니 날카로운 봉우리 무너내려 太極과도 같은 둥근 봉우리여!
목탁소리 울려오고 실개울도 넉넉하니
이날까지 산 빛깔 구름 끝에 단정 하네.
抛樑上하니 하늘 위 해 와 달이 먼저 활짝 열렸네.
조각구름이 어찌 감히 나의 진실 흐리리요?
梵語風 앞에선 아무런 티끌장애도 없네.
抛樑下하니 흰구름 다리아래 玉流가 쏟아지네.
修行人이 慈悲心을 알고 싶으면
청컨대 靈山의 푸른 나무를 비춰 보시게.
엎드려 바라건대 上樑한 뒤엔 우리 大道가 더욱 旺盛해지고 나쁜 기운이 다 사라지소서. 白毫光明 기리 부드러워 萬里의 塵煙을 다 깨끗이 하시고 늘푸른 눈빛광명 四海의 修行者들이 興盛케 하소서. 수많은 스님들이 (이 道場에서) 得道한다면 누군들 慈悲의 遺芳을 입지 않겠으며 우리 後人들을 깨우쳐 주시면 모두가 成功을 이루고(作)도 남음이 있으리라. 바라건대 오늘의 이 시작이 계속되어 이와 같은 생각이 마침내 영원해 지이다. 黃巳年 ?首月 上澣 前 社稷參奉 義興 朴重植 撰 (1809년 오월 초열흘 전 사직참봉 의흥 박중식 짓다.)
죽림사 실기문
상량문2
정묘년 팔월에 그때 面長 權銓斤과 住持 김노성 두 사람이 뜻을 세우고 郡의 主事 박만수와 信徒 박윤여 이영증 이일우 김두하 김규연 등 여섯 사람이 佛敎 期成會를 組織하여 善男善女를 多數 募集해 초가집 다섯간을 布敎堂 名義로 사 들이고 佛敎協會를 成立한 뒤에 布敎堂 法堂을 建設 하기 위하여 己巳年 五月에 住持 김노성, 信徒 李榮增 두 사람이 慶州郡 陽北面 大本山 祗林寺에 가서 義捐金을 要求한 결과, 기림사의 七星閣이 內部 幀畵는 없고 外部 木材만 있는 것을 생각하여 義捐金을 요구한 본 뜻은 없어진 채 대신 七星閣 木材를 얻어오기로 合意하고 왔었다. 그때 기림사 住持 鄭曉隱스님이 칠성각 목재를 날짜를 정해 全部 주기로 하여 이를 東海船으로 運搬한 후에 男女信徒들의 기꺼운 義捐金을 多少 모아서 드디어 이와 같이 다시 집을 지으니 己巳年 六月 十二日에 기둥을 세우고 上樑하였다. 世尊應化 二千九百五十六年 己巳 六月 十二日 (1929년6월12일)............
1. 절의 연혁
[지금의 죽림사는 신라시대 창건되었다가 1809년 己巳(순조9년)에 중창되었다. 지금 이 죽림산은 신라시대 봉비산(鳳飛山)이라 하였으며 그 아래 한 구역에 빈 절터가 있으니 이것이 당시의 죽림사 자리다. 신라때 원앙 부인이 [수도(修道)]도를 닦던 도량이고, 그 아들 안락국이 대도를 깨달은 자리다. 이에 하늘이 이 자리를 비추니 운이 크게 통하여 이르렀다. 법당은 자광전 (慈光殿)이라 하였다. 죽림사는 120년만인 1929년에 다시 중수하였다. 정묘년(1927년) 팔월에 주지 김노성 법명 용연 스님과 당시 면장 권전근이 뜻을 세워 신도 여섯이 불교 기성회를 조직하여 선남선녀 다수가 모금해서 초옥 다섯 칸을 사들이고, 불교 협회를 성립한 후에 당시 본사 기림사의 칠성각 재목을 양도받아 동해선 으로 운반한 후 신도들이 모금하여 법당을 중수하였다. 1929년 1월 12일 중수공사를 시작 그 해 6월 12일 상량(上梁)하였다. 화주, 용연 주지, 이상화 상량문(上梁文)] (당시 포항 최초의 사찰임.) 이상화주지스님께서 다시 중수 불사 하였으나 포교당으로써 너무 협소하여 1980년 중창불사위원회를 조직하여 도로(道路)로 편입된 사답(寺畓)을 보상받아 대웅전과 유치원 건물을 새로 건립하였다.1996년 삼성각을 신축하였다.
2. 절의 활동
죽림사는 대한 불교 조계종 불국사 포항 포교당으로 전법도량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신도회, 관음회, 지장회, 유마회 등의 신도 모임이 있고, 반야 합창단, 청년회, 학생회 등의 많은 활동이 활발하다. 청년회와 학생회는 1947년 창립하여 오랜 역사와 전통이 있으며, 불교 포교에도 많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포항 불교 사회교육원』 운영계획을 가지고 있으며, 도심 속에서 부처님 품안처럼 따뜻한 사회와 정토세계를 구현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시작하고 있다. 포항불교 사회교육원의 주요 사업계획으로는 독거노인들과 영세노인들을 위한 무료급식, 무료진료소, 불우 청소년 및 소년, 소녀가장들을 위한 청소년 상담소, 노인들을 위한 의, 식, 주 해결, 진료당의 자원봉사 등을 할 예정이다. 또 불교 교육시설로 현재 포항불교대학을 운영하고 있어, 불교교리를 좀 더 쉽게 이해시키고, 자비사상으로 불국토의 이상을 건설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포항 지역민이면 누구나 가능하며 교육과정은 주2회 수, 목 2년 과정으로 포교사를 양성하고 있다. 사회, 문화 교육시설로 주1회 역사.문화교실을 운영하여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올바르게 이해시키고 忠, 孝, 예절을 중심으로 우리의 전통사상을 고취시키는데 그 목적을 두고 현장(유적지 등) 학습도 병행시켜 교육할 예정이다. 지역사회의 어려운 곳을 살필 수 있는 자원봉사단을 발족하여 독거노인세대와 소년, 소녀가장세대, 지체부자유세대들의 어려움을 살피는 것을 목적으로 운영할 예정이다. 이처럼 죽림사는 그 전통과 역사를 바탕으로 현대 불교 포교에 큰 힘이 되고 있다.
주소: 37686 포항시 북구 탑산길 10번길 11-4 (용흥동)
전화 : 054-247-4688